벽광나치오 -
안대회 지음/휴머니스트 |
"인문사회 대표저자 이벤트" 에 당첨되서 랜덤으로 받은 책.
나는 그리스라틴 고전번역 전문가인 천병희님을 추천했다. 내가 추천한 저자의 책이 아닌 다른 분의 책이 와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 책도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책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18세기 조선의 예술가, 기술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시대를 떠나서 자신의 일에 미쳐있는 사람은 존경스럽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1. 과학자, 정철조
화가,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기술자, 벼루제작자. 모두 정철조에게 붙는 타이틀이다. 가히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할 만하다.
특히 벼루제작자라는 타이틀이 인상적이다. 초등학교 서예 시간에나 써봤던 벼루에 대한 기억은 투박하고 개성없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벼루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 당시 예술을 안다는 사람은 정철조의 벼루 하나쯤 가지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벼루가 예술적 가치가 높고 양적으로도 상당히 많은 수의 벼루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냈던 듯 하다.
조선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면 백자나 서예, 문인화 정도만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조선 후기의 예술, 문화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채롭고 풍요로웠는지도 모르겠다.
2. 화가, 최북
정말 기인 중의 기인인 듯 하다. 그는 한 쪽 눈이 멀었는데 그 이유가 송곳으로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른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강요 받은데에 대한 반항이었다고 한다. 행위에 대한 이유는 틀리겠지만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가 오버랩된다. 이런 기행 때문에 오히려 그림 실력이 평가절하된 면이 있지만 정선, 김홍도에 견줄만큼 그 실력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책에 공산무인도라는 그림이 실려있다. 그의 다른 그림들에 비해 투박하고 단순한 그림이지만 그 쓸쓸한 느낌에 가슴 한 켠이 짠한 느낌이 들었다. 개인이 소장 중이라는데 언제 한 번 실물을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3. 무용가, 운심
18세기 조선에서 최고로 유행했던 춤은 검무라고 한다. 그 검무의 최고봉에 올랐던 사람이 기생이자 무용가였던 운심이다(운심은 '연아'라는 이름도 썼다고 한다).
"연아가 스물에 장안에 들어가 가을 연꽃처럼 춤을 추자 일만 개의 눈이 서늘했지. 들으니 청루에는 말들이 몰려들어 젊은 귀족 자제들 쉴 새가 없다지." - 신국빈.
조선시대 역사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남자다. 여자가 등장하는 경우는 신사임당 같은 현모양처가 아니면 기생인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이런 부분이 좀 아쉬웠다. 하지만 운심처럼 비록 기생이지만 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보면 경외심이 든다. 또 잘은 모르지만 그 당시 기생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일개 술시중을 드는 부류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점점 든다. 아마도 폐쇄적인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자아를 지키며 재능을 꽃 피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었나 싶다.
4. 책장수, 조신선
조선왕조는 서점을 설립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지식과 정보 통제의 용이성이 그 이유다. 그 때도 지금처럼 권력자들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그 권력을 유지하려 했나보다. 아무튼 그래서 조신선 같은 책장수들이 활약하게 된다. 서점을 차려 놓고 책을 파는 것이 아니라 보따리상처럼 책을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책을 팔았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책장수가 조신선이었다.
그는 이름만큼이나 정말 신선같은 면모를 많이 보여줬다. 일단 백 살이 넘게 장수했는데 그 용모가 항상 사십 세 정도로 보였다고 한다. 또, 다른 책장수들처럼 보따리에 책을 가지고 다지니 않고 책들을 몸에 품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책의 양이 많을 때는 백권 가까이 됐다고 한다. 그 많은 책들을 품에서 한 권 한 권 꺼내 놓을 때마다 사람들이 무척 놀랐다고 한다. 그의 책에 대한 사랑과 지식도 대단하지만 이런 미스테리한 일화들이 너무 흥미롭다. 그는 정말 신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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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음악가, 김성기
그는 본래 활을 만드는 장인이었으나 거문고 연두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결국 악사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그의 악사로서의 경력은 연주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에는 드물게 새로운 악곡을 짓는 작곡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를 더 돋보이게 하는 행보 중 하나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은퇴를 했다는 것이다. 가족도 버리고 마포(그 당시에는 시골이었다고 한다)에 은거하여 고깃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며 지냈다. 낮에는 낚시를 하고 밤이면 퉁소를 연주했는데 강가에서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은 다 그 자리를 배회하며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남들(특히 높으신 분들)이 원하는 연주를 하기 보다는 진정 자신이 원하는 연주를 원하는 시간에 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음악을 음악 자체로 사랑한 진정한 예술가인 것이다.
나는 음치에 박치라서 어렸을 때부터 의도적으로 음악(특히 악기 연주)를 멀리 해왔다. 하지만 요즘 악기 하나쯤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김성기처럼 남을 의식하지 않고 음악 자체를 즐겨 보고 싶다.
6. 기술자, 최천약
무인이자 18세기 최고의 기술자였던 최천약. 조각에 능했고 특히 자명종 제작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중요한 국가 사업에 최고의 기술자로 빠지지 않고 참여했던 그지만 기술자보다는 무인으로 대접 받길 원했다. 공인(기술자) 명단에 자신이 함께 올라가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 최천약이 자신의 일에 자긍심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 시대에 사람들이 기술자를 천한 계급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지금도 이런 마인드가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아 더 안타깝다.
아무튼 그 시대에 그의 기술이 정말 독보적이긴 했나보다. 최천약 사후에 사도세자의 묘에 석물을 조성할 때 한 신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좋은 돌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으나 최천약 같은 자를 오늘날 어떻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그의 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재적인 개인 한 명에 의해서 프로젝트가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일이다. 이런 기술 분야(특히 내가 일하고 있는 분야인 소프트웨어 개발)에 있어서 그래서 시스템, 아키텍쳐나 방법론이 중요한 것이다. 정해진 시스템만 따라가면 프로젝트 진행에 큰 문제가 없어야 한다. 물론 최천약 같은 천재가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만 말이다.
7. 바둑기사, 정운창
그 당시에도 바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프로 바둑기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경상도 밀양 출신인 정운찬은 그 중에서도 특출난 사람이었나보다. 그는 어려서 바둑을 배웠고 고향에서 더 이상 상대할 사람이 없어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유명한 바둑 기사들을 차례로 이기고 짧은 시간에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왠지 격투기 고수의 도장깨기가 떠오른다.
이 챕터에는 정운창 외에도 많은 바둑기사들이 언급된다. 한 명 한 명의 일화들이 요즘 연예기사를 보는 듯 재미있다. 기술자나 과학자들의 이야기도 놀랍고 재미있지만 책장수 조신선이나 바둑기사 정운창처럼 왠지 조선시대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직업을 가신 사람들의 이야기가 훨씬 흥미롭다. 어쩌면 내가 조선시대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선 시대, 최소한 영정조 시대로 대표되는 18세기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활기차고 다양성이 인정되던 사회였던 것 같다.
8. 여행가, 정란
여행가 정란은 나이 서른에 나귀 한 마리를 끌고 홀로 전국 팔도를 여행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권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전문 여행가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히려 요즘 세상에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정란 같은 진정한 여행을 수십 년에 걸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정란처럼 순수하게 여행 자체를 위한 여행을 해보고 싶다.
또, 기인은 기인끼리 통한는 것일까. 앞에 나왔던 화가 최북이 정란과 교류하며 그의 여행 그림을 그려줬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9. 원예가, 유박
조선시대 선비들이 매난국죽으로 대표되는 화초를 아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박 같은 원예 전문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유박은 단순히 꽃을 좋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백화암이라는 화원을 운영하면서 서적까지 편찬한 말 그대로 전문가였다.
젊은 나이에 속세를 떠나 평생을 화원 경영에 몰두했지만 사람들과의 인연까지 끊은 것은 아니었다. 명사들이 그를 찬양한 시를 다수 남긴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분명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최고의 전문가였다. 유박이 현대에 살았다면 아마 최고의 전문 블로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10. 시인 이단전
천민 시인 이단전. 단전이라는 이름 자체가 종놈이라는 뜻이다.
글 첫머리에 소개된 일화 하나로 나는 그와 그의 이야기에 매료됐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용휴. 노년에 그는 신분을 문제삼지 않고 실력만으로 작가를 평가하겠다고 선언한다. 신분의 구분이 엄격했던 시기에 정말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들고 당당히 그를 찾아간 이단전. 이용휴는 그에게 최고의 찬사를 내린다. 이처럼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그 능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다면 빛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신분을 탓하지 않고 실력 연마에 힘쓴 이단전과 그런 이단전을 선입견없이 평가한 이용휴. 둘 다 멋진 사나이들이다.
11. 탈춤꿈, 탁문한
탁문한은 양민 또는 그 이상의 신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단전과는 반대로 자신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게 그 당시에는 천민들이 주였던 공연 예술에 종사했다. 그 중 탈춤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그 당시 기준으로는 천한 일을 하는 것도 그 반대의 경우만큼이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탁문한은 이단전만큼이나 시대를 거스를 용기와 확고한 자아가 있었던 사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 이 챕터에서는 탁문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 당시의 공연, 연회 문화에 대한 내용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그가 추었던 탈춤에 대한 묘사나 인생사가 부족한 것이 아쉬웠다. 그 당시 공연 예술에 대한 홀대를 생각하면 관련 자료가 많이 부족한 것이 그 이유라 추측된다. 저자도 언급했지만 앞으로 그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http://bongman.tistory.com2011-08-11T05:35:14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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